뉴스

일본은 왜 근대화에 성공했을까?

eng__rok 2017. 1. 24. 11:53



일본(日本)


세계 제 3의 경제대국이자 세계를 이끄는 G7의 유일한 아시아 국가.




한 나라를 평가하는 수없이 많은 기준에서 대부분 최상위 클래스를 차지하고 있는 대단한 나라.


아시아에서는 부동의 원 탑이라고 봐도 무방한 국가이며,


수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등의 개발도상국들에게 그 롤 모델이 되었던 국가다.


지금의 한국도 일본을 철저히 벤치 마킹 한 결과.



그리고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하여 열강이 된 비서구권 국가이자,


유일하게 서구 열강과 겨룰 정도로 국력이 대단했던 나라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볼 것은 왜 일본은 이처럼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었는가? 이다.


일본이 약 100년 전, 세계에서 날뛰고 지금도 세계에서 최상위 그룹을 형성하는 강대국 라인에 들어간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근대화 이후 축적된 기술력과 경험이다.



우리는 흔히 조선을 욕할 때, 세계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뒤쳐진 나라라고 자책한다.


보다 일찍 개항했으면, 문물을 받아들이고 교류했으면 아픈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큰 맥락에서는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왜 조선은 근대화를 하지 못했는가? 는 잘못된 질문이다.


포커스를 달리 가져야 한다.





일본의 앞바다에 미 해군이 나타나 개항한 것이 1853년이고, 근대화로 개혁을 시작한 것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이다.


베트남은 1773년 대영제국과 군사동맹과 기술협정을 고려하고, 1802년에 사이공을 개항했으며, 본격적인 근대화를 시작한것은 

1862년으로 일본보다 서구권과의 접촉과 개방이 더 빨랐다.



일본, 베트남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고 거대한 제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은 1683년 2차 빈 포위 이후 서구권으로부터의 문물 도입의

필요성을 느꼈으며, 1791년 술탄 셀림 3세에 의해 니자므 제디드라고 불리는 대대적인 근대화 개혁이 착수되었다.


이외의 중남미 국가들은 서구의 자산을 그대로 이어받아 독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열강의 반열에 올라서질 못했다.


오직 일본 뿐이었다.


즉, 우리는 왜 조선은 근대화를 하지 못했는가? 가 아닌


왜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하였는가? 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1. 일본은 지리적으로 근대화에 유리하였는가?



(19세기 말, 태평양 횡단 항로가 본격적으로 개척되기 전까지는 일본은 유럽인들에게 있어 가장 머나먼 세계였다)


일본은 지리적으로 그다지 근대화에 유리한 위치는 아니었다. 세계의 중심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서구권이었고, 18~19세기 무렵의 세계의 중심은

단연 서유럽이었다. 그리고 서유럽인의 왕래가 가장 잦은 곳은 아프리카 대륙과 북남미 대륙이었다. 서양인들이 북남미 대륙을 넘어 태평양을 통해 아시아로 발을 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후반의 일로,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 당도할 때만 하더라도 태평양을 건너 동아시아에 가는 항로가 개척되지 않던 시점이었다. 그리고 설령 개척되었다고 하더라도, 북남미 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은 아직 미개발 지역으로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끼치기 어려웠다.


오히려 지리적으로는 유럽 열강과 바로 마주하던 오스만 제국이 근대화에 있어 훨씬 유리했으며, 단순히 지리적 거리만으로도 일본보다 베트남, 인도 등의 지역이 훨씬 유리했다. 일본은 사실상 세계의 끝에 가까운 지역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지리적으로 가장 불리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중원으로부터 문명의 전달도 가장 늦던 지역이었다. 그들의 지리적 장애는

이제껏 문명의 발달에 있어서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했던 것이다.



(기존의 동아시아 질서에서 일본 열도는 변방 중에서도 변방이었다)


하지만, 이런 지리적 열악함이 일본에 있어서는 꽤나 큰 잇점으로도 작용했는데, 바로 외부 세력의 개입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은 너무 멀었기 때문에, 서구 열강들이 직접 식민지 경영을 하기엔 매우 어려웠다. 신흥 열강 미국이 가장 일본에 진출하기 쉬운 위치였으나, 

남북전쟁이라는 내전이 벌어졌고 설령 내전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도 미국은 신흥 열강으로써 국력이 미진했을 뿐더러 일본 진출의 교도부가 되야 할

태평양 연안 조차도 갓 개척되던 시점이었다. 미국이 해외 식민지 개척이 가능한 국력이 될 무렵은 1898년 미서전쟁 이후의 일로, 일본을 개항시킨 직후의 

미국은 일본을 식민지로 만들 능력이 없었다.


다른 유럽 열강들은 일본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 식민지의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가능한 국가라면, 대영제국 정도가 있었으나 세계의 패권국

대영제국으로써도 일본의 식민화는 큰 출혈을 감내해야하는 일이었다. 대영제국은 인도식민지를 소화시키고 중국에 진출하기 바빴다.


탐욕스런 서구 열강으로부터의 천연 방어막이 있었던 셈이다.


또한, 근대화에 있어서 가장 큰 방해물이었을 주변국들의 개입 또한 철저히 차단할 수 있었다. 전근대에는 중원 대륙으로부터의 문명 전달에 방해가 되던

섬이라는 지역의 특성이 근대에 이르러서는 안정적인 근대화를 추진함에 있어 주변국의 시야와 간섭을 차단할 수 있는 벽이 되어주었다.


일본은 근대화를 진행함에 있어 조선과 같이 청 제국 등의 방해를 받지 않고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전근대까지의 일본에 독으로 작용하던 자연 환경은

운이 좋게도, 서구 열강과 주변국으로부터 절묘한 밸런스로 작용했다.


2. 일본은 정치적으로 근대화에 유리하였는가?



(일본의 천황-막부제도는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특하면서도 미개한 정치 체제였다)



근대화는 절대 간단한 정책이 아니었다. 한 국가와 민족의 정신과 체질을 완전히 유럽의 백인 국가들처럼 개조한다는 의미다.


이미 서구화가 완료된 지금의 동양인들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난이도다.


일반적인 개혁 조차도 상당한 내부의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공납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대동법의 초안이 이야기 된 것이 1569년인데, 완전히 정착하는것은 1708년이다.


근대화는 이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힘들다.


보통은 이런 대대적인 개혁에 있어서는 군주의 강력한 권력이 그 원동력이 되곤 했다.


그러나 근대화의 경우는 달랐다.


대부분 좋지 못한 결과를 맞이했다.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군주가 좋지 못한 결말로 끝을 내거나,


혹은 반대로 군주가 근대화에 부정적이어서 정치적 사화를 일으키는 경우였다.


위대한 오스만 제국의 셀림 3세가 의욕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다 예니체리들에게 암살당했고, 


조선과 대청제국은 기득권층의 변동에 근대화 세력이 퇴보하기 일수였다.




(예로부터 개혁적인 지도자는 반대파와 기득권의 저항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매우 특이했다.


사실, 19세기 초반까지에 있어서 일본의 정치체제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후진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중원 대륙에서는 기원전부터 중앙집권화가 시작되었으며, 기사로 유명한 유럽지역도 15세기를 넘어가면서 중앙집권화가 급속도로 자리잡아 갔다.


중앙집권은 강력한 정부와 국가의 구성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로, 봉건제는 흔히 구시대의 유산으로 여겨졌다.


일본은 19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중앙집권을 완성하지 못한 막부제라는 매우 특이한 유사 봉건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는 최고의 문명인 백인들을 제외하더라도, 당장 바로 옆나라 조선에 비해서라도 아주 후진적인 정치체제였다.


그러나 이런 정치 체제는 근대화의 물결에 있어 오히려 큰 잇점으로 작용했다.


일본의 천황은 실권이 없었고, 쇼군이 그 모든 실권을 쥐고 있었는데 쇼군의 지위는 힘으로써 쟁취한 것이지 그 어떤 법률상의 보장된


지위가 아니었다. 즉, 힘만 있다면 누구든지 쇼군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결국, 쿠로후네 사건(페리 제독의 일본 강제 개항) 이후로 일본 막부에 대한 불신이 확신되자, 과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활약하던


전국시대처럼 각지의 영주들이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해 서구 국가들과 접촉을 스스로 늘려갔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인도 무굴제국이나 혹은 오스만 제국과 비슷할 것이나, 인도 무굴제국과 다른 점은 인도의 무굴 제국과오스만 제국은 각지의


영주 또는 총독이 너무 큰 권한과 힘을 갖고 있었지만, 일본의 각 번은 완전히 독립세력으로 성장하기에는 부족한 적당한 사이즈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과는 달리 천황이라는 모두의 구심점이 있었기 때문에 근대화 과정에서 흩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일본의 후진적인 정치체제는 낡고 약해빠진 쇼군을 몰아내고 우리도 천황을 중심으로 제대로 된 정권을 이룩하자는 대의명분을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일본의 독특한 정치체제는 천황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며, 근대화까지 동시에 이룩했다)


결국, 구 시대를 청산하자는 구호에 대정봉환 등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고, 그 원동력은 메이지 유신까지 이르게 된다.


이 와중에 보신전쟁이라는 내전이 있었지만,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주자는 것에 대해 명분을 잃은 구 집권층 막부는 타 국가의 집권층처럼


격렬하게 근대화 세력을 탄압할 수는 없었으며 타 국가에 비해서는 다소 싱겁게 근대화 세력이 안정적으로 집권할 수 있게 되었다.


유사 봉건제인 막부정권의 후진성과 불안정성이 역으로 정권교체가 용이해지고 급진적인 개혁이 가능해졌다.


중앙 집권화를 성공함과 동시에 근대화로 동시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3. 일본은 경제적으로 근대화에 유리했는가?



일본의 경제적 능력은 사실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꽤나 높은 수준이었다.


이미 일본 열도의 경제적 규모와 성과와 능력은 통일신라 시기부터 한반도 전체와 동등해져갔으며, 9세기가 지나는 고려 초엽부터는


일본 열도는 한반도를 앞서고 압도하기 시작한다. 애초에 한반도는 상당히 가난한 지역으로써, 마땅한 산물도 없고


그렇다고 규모의 경제를 이룩할 수도 없는 지역이었다. 한반도처럼 산지가 많고, 섬에 불과한 일본이지만


일본의 간토 대평야 만으로도 한반도 전체의 생산량과 필적할 수준이었다. 한반도의 강원도 만한 땅이 전부 평야이니 이미 생산력 자체에서


게임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한반도 보다 더 온난한 일본의 기후는 더욱더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격차를 벌여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세기 무렵까지 한반도 정권이 일본 열도에 대해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훨씬 더 선진적인 정치 체제와


중국 대륙과 가깝다는 잇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은둔의 왕국 조선과는 달리 일본은 꽤나 오래전부터 세계 무역에 들어와 있던 나라였다.


일본은 중앙정부가 부실했던 만큼, 각 지역의 영주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크게 활약했는데


대표적으로는 왜구가 있겠다.




왜구는 일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해적 집단을 일컫는데, 그 주요 구성원은 일본인에 중국 대륙본토 출신과 한반도 출신자들이 어우러지는 형태였다.


심지어, 포르투갈 네덜란드인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매우 악랄한 해적 집단이었으나, 대부분 실질적인 정체는 각 다이묘들의 사략함대와 같았다.


중세 바이킹이나 캐리비안에서 활약하던 잉글랜드의 사략함대를 연상하면 되겠다. 


왜구는 악랄한 해적들이었지만, 달리 보자면 위대한 항해자들이었고 수에 능한 상인들이었다.





(붉은 별은 일본인들의 계류지가 있었던 곳, 초록 별은 일본인들의 마을이 형성되었던 지역이다)


일본인들은 동남아 일대까지는 쉬이 진출해서 약탈 혹은 무역으로 이미 세계 무대에 어느 정도 진출했었다.


유럽 세력들이 이 지역까지 진출하자 나가사키를 통해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과 교류하여 문물을 전수 받은 것은


이미 대부분의 한국인들도 익히 알 것이다.


그 전래된 철포들이 사용된 곳이 바로 한반도의 임진왜란이다.


이런 무역적인 루트를 제외하고도 일본은 자국 내 경제력에서 상당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이와미 은광은 한때, 세계 유통되는 은의 3분의 1을 생산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찍이 전국시대부터 전국적인 유통망이 형성되고 자국 내 상업이 발전하였다.


이는, 돈 말고는 자신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었는데, 결론적으로는 일본에 큰 득이되었다.


일본의 세율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손병규 교수에 따르면 18세기 조선의 결당 생산량은 600두 정도로 


토지세와 군포, 공납, 잡세 등 대략 180~200두 정도의 세율로 33% 정도의 세율 정도였다.


하지만 일본은 전국시대에는 1회 생산의 90~100%의 생산량을 세금으로 징수하는 등


가히 살인적이었다. (일본은 기후 덕택에 이모작이 가능했다)


조선식으로 계산하면 600두 중에서 1결당 전세로 300~400두 정도를 징수하는 수준이었는데


가뜩이나 생산량도 많고 땅도 넓은 일본 정부는 저예산의 조선 정부의 재정을 압도했다.




1871년 메이지 유신 직후의 일본 총 세입은 1,255만 석 가량이었다. 이중 막부 직학령의 세수는 총 세입의 4분의 1 수준이었는데,

대략 300만석 정도일 것이다. 비슷한 시기인 18~19세기 조선의 총 세입은 96만 석으로 일본 총 세입에는 13분의 1수준에 불과했고,

막부 직할령과 비교해도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조선과 비교해서 얼마나 재정적으로 부유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조선보다는 일본이 기형적으로 재정이 풍족했다고 볼 수 있는데,


1812년 대청제국의 총 세입은 약 1,000만 석 규모였다. 즉, 중국 대륙을 전부 차지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던


대청제국보다 더 큰 재정 규모를 가진 것이 일본이었다.


그나마 이것은 토지에 대한 구시대적인 지세의 비교일 뿐이고, 산업발전에 성공한 1900년 경에는 


이런 지세가 일본 재정에 차지하는 규모는 15% (1871년 당시에는 70%)에 불과해져, 더욱더 조선과 청과 격차를 벌린다.


근대화는 정부 주도의 대규모 공업화가 수반되어야 했고,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이런 재정적 뒷받침이 가능했던


일본만이 실시할 수 있었다.


재정적 뒷받침이 없었던 조선은 거의 실시할 수 없었고, 중국은 미약하게 실시했을 뿐이다.


기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본은 이런 타고난 위치와, 기가막힌 운대, 그리고 내재적인 역량이 어우러져


서구열강 이외의 유일한 열강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약 80년간 세계에 일본제국으로써 그 이름을 떨치게 된다.



3줄 요약


1. 안좋았던 위치선정이 오히려 이점


2. 타고난 운의 작용.


3. 이미 동아시아권 내에서 독보적인 내재적 역량